적상면 서창에서 올라가면 산성의 서문을 가까이 두고 절벽이 칼로 내려 친 듯이 갈라진 곳이 있다. 한쪽 부분이 물러나 길에서 5m의 높이로 서 있고 절벽과 그 사이는 사람 하나가 지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생겼다. 그 거리는 10m쯤 된다. 이 길이 없다면 그 절벽을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지점인데 천연 그대로의 상태인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 절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최영장군이 산정으로 오르다가 이 절벽에 막혀 앞으로 더 갈 수가 없게 되자 장도로 내려쳐서 길을 냈다고 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름도 장도바위이다.
<서문지>
서문(西門)은 일명 용담문(龍潭門)이라고도 하였으며, 규장각에 소장된(적상산성조진성책)의 기록에 의하면 2층 3간의 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성 밖에 서창(西倉)과 고경사(高境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창은 미창(米倉)과 군기창(軍器倉)이 있었으나, 지형이 험하여 성내까지 운반이 어려워 조정에 상소하여 성내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고 전하며, 지금도 마을이름을 서창이라고 부른다.
<무주호>
무주호는 양수 발전소 하부 저수지로 중앙차수벽식 석괴댐 형식이며, 높이 42.6m, 길이 234m, 체적550,000㎥, 만수위가 EL 278m, 저수 용량이 총 6,400천㎥이다. 이곳은 포내리(浦內里)란 지명에 걸맞게 무주호가 생김으로 신록의 봄과 붉게 물든 가을 적상산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맑은 호수 속에 반영되는 풍광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운 곳이다.
<머루와인동굴>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 일대에 무주군의 대표적인 특산품인 산머루와인의 참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머루와인동굴이 아름다운 자연경관, 문화유적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주産머루와인의 숙성 및 저장, 판매 공간인 머루와인 비밀의 문 과 와인 하우스로 구성돼 있으며, 지상 2층에 조성된 와인하우스(163.73㎡)에는 반딧불 농·특산물 판매장, 그리고 머루와인 비밀의 문(270m)에서는 와인카페와 와인시음 및 저장고 등을 만나볼 수 있다.특히, 머루와인 비밀의 문에서는 자연적으로 연중 13℃ ~ 17℃의 최적의 온도가 유지되며 연인들을 위한 와인 키핑 장을 비롯한 결혼과 만남, 승진에 관한 축하 문구를 와인병에 새겨 선물할 수 있는 애칭조각와인 택배 이벤트를 운영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천일폭포>
천일폭포는 적상면 북창마을에서 약 2.8㎞지점 산성아래 호젓한 곳에 있는 폭포다. 높은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는 30여m로,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소리는 심산의 정적을 깨고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끼게 하며, 흩날리는 비폭을 타고 금방이라도 선녀들이 내려올 것만 같다.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폭포라는 이름에 걸 맞는 명소이다.
<적상산 전망대>
적상산 전망대는 양수발전소 발전기 급정지 시 수로내의 압력이 급상승하는 것을 완화시켜주는 조압수조로 적상산 분지(적상호)에 위치해 있으며, 발아래 펼쳐지는 운해속의 능선들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맑은 날에는 남쪽으로 덕유산 향적봉과 지리산 천왕봉이, 북쪽으로는 무주읍과 충남 금산까지 보이는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적상사고>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을 약 300여년 간 무사히 보관했던 곳으로 역사 학습장으로 많은 관광객들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전시관은 <조선왕조실록> 복본 34권 (왕조별로 1권씩 27권, 무주에 관한 기록 7권)과 왕실 족보인 <선원록> 복본 5권을 제작해 비치했다. 또 실록 제작·편찬 과정 및 봉안행렬 등을 담은 22종의 전시패널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주군관광해설 사가 관람객에게 적상산사고의 역사적 가치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알기 쉽게 해설을 하고 있어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에게 꼭 가볼만한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전 평지에 있던 4대 사고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전주사고의 실록을 임진왜란 이후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마니산(후에 정족산으로 이관) 등 5대 사고를 설치하여 각각 실록을 보관했다. 당시 북방 침입으로 인해 묘향산 사고의 실록이 보관에 어려움이 있자 무주의 적상산에 실록전을 세우고, 1634년 묘향산의 실록을 옮겼다. 그 후 1910년대에 일제에 의해 사고가 폐지되자 적상산의 실록은 왕실 장서각으로 옮겨 보관 해오다 6·25 때 북한으로 반출됐으며 김일성 종합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사고지가 수몰되자 사고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1997년 선원각, 1998년 실록각이 복원 되었다.
<적상산성>
적상산성은 적상면(赤裳面)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창리·포내리·괴목리·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있는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石城)을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적상산성의 축성 시기는 옛 문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 중엽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 이전에 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시대적 정황과 축성방식 등을 볼 때 백제에서 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방치되었으나, 고려 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따라 인근의 여러 고을 백성이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던 것이다.
차츰 잊혀져가던 적상산성의 중요성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 북방의 후금이 강성해짐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의 보존문제가 논의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선원록의 보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새로운 장소가 물색 되었는데, 적지로 적상산성이 거론된 것이다. 이처럼 적상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에 축성되어 한 때 방치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인근 백성의 피난처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사고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상실하게 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의 보존과 함께 유지가 남아 있다.
<장군봉>
적상산 장군봉은 호국사 앞 적상산성에서 내려 보이는 암봉으로 우뚝 선 자태가 마치 늠름한 장군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장군봉이라 불린다. 또한 이곳은 연두색 봄과 붉게 물든 가을이 참 아름다운 곳으로 새하얀 운해 위에 오색 갑옷으로 갈아입은 장군봉의 빼어난 풍경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안국사>
본래 적상산 분지에 위치했던 이 사찰은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화상이 창건한 것이라고도 하고, 조선 초 무학대사가 국가의 앞날을 위해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광해 5년(1613) 사찰을 중수하고 그 다음 해에 창건된 적상산 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보경사 또는 상원사 등으로 부르던 것을 영조 47년(1771)법당을 중창하고 안국사라 했다. 더러는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 하여 산성사라고도 불렸으며 부처님 1천불을 모신 천불전과 보물 제1267호인 안국사영산회괘불탱이 있으며 현재의 안국사는 본래의 위치가 양수발전소 상부댐(적상호)에 잠기게 되어 1992년에 옮겨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