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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의 명량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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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훈 2010. 10.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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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아래에서 펼치는 명량대첩 재현은 감동적이었다. 명량대첩은 1597년 일본군이 2번째 조선에 침입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인 그해 1월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가 된 원균은 일본군에 대항했으나, 대패하고 전사해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정부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해 적을 막도록 했는데, 이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군사 120명과 병선 12척뿐이었다.

 

 

일본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해 서해로 진출하려 하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서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했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으나 조선수군의 철저한 경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아, 9월 15일 우수영(右水營 : 해남군 문내면)으로 수군을 옮겼다.  명량은 간만(干滿)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다음날 새벽 일본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았다.

 

 

그리고 이순신은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 등을 독려해 적진으로 돌진시켰는데, 적선 3척의 일본군이 안위의 배에 올라 격전이 벌어졌고, 이순신은 총통을 쏘아 3척을 불질렀다. 군사력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고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일본수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일본 병선 31척을 격파했고, 일본수군은 달아나버렸다. 이 해전은 12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일본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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